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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가위 감독의 절제된 영상미가 돋보였다고 평가되는 2000년 영화 <화양연화>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90년대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라도 손꼽을 만한 작품으로 앙가위 감독 스타일의 집대성이라 불릴 만큼 스타일리시한 색감과 영상, OST를 선보입니다. 특히 이전 작품까지 트레이드 마크였던 고속촬영에 따른 핸드헬드 기법과 스템 프린팅을 배제하고 슬로모션 촬영을 통해 60년대 홍콩의 몽환적인 느낌을 최대한 살렸습니다.
화양연화 기본정보, 줄거리
60년대 초반을 시작으로 70년대 초반까지 연결되는 배경 안에서 끝내 함께하지 못하는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느린 영상들과 그 분위기를 살려주는 감미로운 재즈곡들의 몽환적 선율이 뒷받침해 줍니다. 특히 <아비정전> 속 수리진의 영장선상에 있는 듯 수수함과 화려함, 그리고 도도함까지 장착한 치파오를 입은 장만옥 배우의 매혹적인 분위기는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누가 작품을 보건 그녀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길 수밖에 없는 치사량의 매력이 담겼다 생각됩니다. 그럼 매력적인 영화의 이야기를 본격 적으로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봤어요: 1962년 홍콩, 상하이에서 온사람들이 거주하는 아파트에 홍콩 지역신문사 기자 차우 부부와 무역 회사에서 비서로 일하는 수리첸 부부가 같은 날 이사를 오게 됩니다. 그들은 이사 온 날부터 좁은 아파트에서 서로의 물건이 뒤바뀌며 인사를 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은 일본인 무역 회사에 근무해 출장이 잦고 그의 아내 역시 호텔에 일하며 비우는 시간이 많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우는 수리첸의 핸드백이 아내와 똑같다는 것을, 수리첸은 남편의 넥타이가 차우 것과 똑같다는 것을 깨닫고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힙니다. 자신들의 남편과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외룸 때문인지 점점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마음을 뺏기기 시작하지만, 이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려 노력합니다.
'치파오'를 떠올리면, 그녀가 생각날 거예요: 미스 홍콩 출신으로 데뷔 초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에서 여자친구 아미 역할로 처음 접했던 배우 장만옥. 그 당시만 해도 소리만 꽥꽥 지르며 특별한 연기가 필요 없는 몸 개그만 했었는데, 1988년 유덕화와 함께 찍은 <열혈남아>를 계기로 본격적인 연기파 배우의 발판을 만듭니다. 이후 관금붕 감독의 <인재뉴약>을 통해 금마장 여우주연상, <롼링위>를 통해 홍콩 여배우 최초로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대표 스타가 됩니다. 스캔들과 빡빡한 스케줄로 잠시 쉬기도 했지만, 90년대 당시 누아르 액션의 홍수 속에서 본인만의 연기 색깔을 확실히 구축해 왔다고 보입니다. 이후 정점을 찍은 것이 1996년 <첨밀밀>과 이 작품 <화양연화>입니다. 양조위 배우 또한, 분명 무게가 있는 주연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장만옥 배우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치파오를 입은 그녀의 매력은 도저히 누가 따라갈만한 아우라가 아니었습니다. 옷과 특유의 몽환적 분위기를 이끄는 그녀의 눈빛, 손길, 대사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박혀 들어오면서 배우의 매력을 남김없이 보여줬습니다.
화양연화 후기
우린 그들처럼 되지 않아요. 우린 그들과 달라요: 출장이 낮은 남편 때문에 혼자 국수를 사 먹는 리첸, 화려한 치파오 의상은 결혼에 대한 이상을,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현재 행복하지 않은 결혼의 현실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국수 역시 가늘고 오래 행복하게 산다는 염원이 담겨있는 음식인데 그녀의 이루고자 하는 행복한 일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어서 좁은 집안 복도에 이어 국숫집 계단에서 마주치는 차우, 현악기 연주 장면은 그들의 변화되는 모습을 비추고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인데, 꼭 친절한 금자씨의 한 장면인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합니다. 방안에 첸 부인의 남편이 있었던 듯 아파트 문 앞에서 누는 두 여인의 건조한 대화, 호텔에 찾아가 멋쩍은 대화를 하는 차우를 보며 두 사람의 공허함은 가득해집니다. 그리고 서로의 속마음을 숨긴 채 다방에서 나누는 대화에서는 살짝 웃음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서로 보는 관점의 넥타이와 가방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미 서로의 남편과 아내가 바람피운다는 사실을 둘 다 알고 있음에도 망설였던 두 사람이 걸어가는 거리와 깔리는 음악은 꽤나 인상적이고 서로 반복적인 대화를 하며 늦은 밤길을 걷는 장면은 애틋함과 거리가 먼 장면임에도 그 뭔지 모를 감정이 깔리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분위기만으로 가득 채운 애틋함이 제목처럼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회상하게 만들어줍니다. 두 사람이 함께 마주했던 좁고 어두운 골목 같았던 지난날의 마음은 추억이 되었지만 희미한 가로등 빛에 갈라지는 빗줄기처럼 그날의 망설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그 시절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그 사랑을 가지지 못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가질 수 있었던 이야기가 담겨있었습니다. 리마스터링 4K와 다르게 DVD판에는 왕가위 감독이 불필요하다 생각한 삭제된 부분들이 있는데, 1966년에 캄보디아에서 재회하는 두 사람의 짧은 대화 장면, 싱가포르에 간 첸 부인이 아핑을 만나는 장면, 2046호 실의 비밀, 두 사람이 잠자리를 시도하려던 장면, 1972년에 우연치 않게 마주한 변화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본 자체가 3시간이었다고 하니 99분으로 축약했더라도 많은 부분이 더 있었던 느낌입니다. 몇 번을 보았을지 모를 작품이고 해석까지 덧붙인다면 2046호 실에 대한 풀이나 붉은색의 의미, 삭제 부분과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정말 많은 것들을 논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누가보아도 두 사람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간절하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아직 왕가위 감독의 작품을 안 보였다면, 저는 이 영화를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좋은 영화와 함께 즐거운 하루 되길 바라겠습니다.